축제로 무르익은 일곱 살 여름 방학이었다.
내가 살고 있던 동네는 발길이 닿는 곳곳 해변 내음이 묻어 있는 작은 바닷마을이었다. 여름은 나태하기 쉬운 계절이라 활기를 충당해야 한다나. 그런 이유로 가족들 손에 이끌려 축제에 따라나섰다. 등 뒤로는 폭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메우는데, 나는 눈물 젖은 얼굴로 끅끅대며 박자 맞춰 울었다. 희미하게 들려온 오르골 소리에 이목을 빼앗겨 잠깐 놓았던 손이 원흉이었다. 발이 뻐근할 정도로 걸어도 어둠만 깊어져갔다. 손길이 간절했던 순간, 어떤 목소리가 자꾸만 귀에 흘러들었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 같기도 하고, 어쩌면 굼뜬 노랫말 같기도 했다. 왜인지 나를 부르는 소리처럼 느껴져서 소리 나는 쪽으로 걸었다. 그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혈기 잃은 생김새는 허수아비처럼 맥없고, 쫙 찢어진 눈과 입이 기이한 괴인. 몸에는 잡다한 장신구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그가 상인일 것이라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당신의 계절을 파시겠습니까?”
계절을 팔라니. 난생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문장이었다.
“우리는 기억을 계절이라고 명명했거든요.”
푸석하고 차가운 손이 내 손 위를 감쌌다.
두려움 위로 호기심이 잇다랐다. 괴인은 목돈을 내보이며 다정하게 나를 타일렀다. 내 봄이 사고 싶다고. 봄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쯤 낌새도 못 느낄 거라고. 속삭이는 말을 이유 없이 수긍하고 싶었다. 낯선 사람의 손에 들린 사탕 맛은 괜히 궁금해지는 마음처럼, 이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꺼운 지폐가 손에 들렸고, 찰나에 봄을 빼앗겼다. 소란한 분위기 속에서 첫발을 알렸던 불꽃놀이가,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의 들뜬 얼굴들이 찬찬히 잊혀져갔다. 몽롱한 상태로 괴인의 안내에 따라 숲을 벗어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시선이 갔던 작은 원목 오르골을 샀다. 직접 돈을 지불하고 무언가를 산 건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가자 엄마는 어디서 난 돈이냐며 나를 꾸짖었다. 누구도 믿지 않을 것 같아, 기억을 팔았다는 말은 운조차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신기루 같던 괴인과의 거래는 나만의 기억인 채로 아득히 묻혀 있었다.
열일곱,
또 다시 여름.
창 너머로 새어든 무더위에 땀 맺힌 하복 셔츠가 부끄러워지던 사람이 있었다.
갈라진 책상의 중앙선이 야속해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애 앞에서는 모든 언어가 고백이 되는 것 같아 입술을 물게 되던 순간들이.
내 짝이었던 그 애는, 맨 윗 단추까지 걸어 잠근 단정한 교복이 잘 어울리던 사람이었다. 높낮이가 적당한 목소리도, 한낮 같은 다정함도 자연스레 호감을 이끌었다. 가끔은 군데군데 붉은 손가락 뼈마디 위로 내 손을 포개고 싶었다. 그러다 정말 가끔은 숨통 조일 것 같은 셔츠 단추 몇 개를 직접 풀어 보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도 남몰래 하게 되던, 시리고도 저릿한 첫사랑.
그 애의 손을 핑계 없이 쥘 수 있게 되던 날에는 세상을 갖는 일이 꽤나 손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름 축제날 맞잡을 손은 오롯이 너였고, 발길 닿는 대로 달려 당도한 해변에서는 황혼의 정점을 맛봤다. 앞에 선 그 애의 형태마저 어쩌면 거짓일까 싶어 눈 감는 찰나가 두려워지기도 했다. 밤공기가 스쳐 차가워진 모래사장에 앉은 너와 내가 어둠을 가르고 시선을 마주할 때, 심장의 진동을 닮은 폭죽 소리가 세상을 메웠다. 야음 내린 투명한 밤바다 표면은 화려한 불꽃의 아우성을 선명히 담아냈다.
그게 감긴 눈 위로 얼굴을 포갤 수 있는 용기였고,
울렁이는 심장 소리가 아무리 새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밤이었다.